고린도전서 14장 더 큰 은사: 예언

주요 구절: 고전 14:40

1 Corinthians 14:40 ESV - But all things should be done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은사를 사유화하거나 남용함으로 나타난 문제를 해결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질서를 강조합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에게 나눠주는 것(12:11, 18)이기 때문에 ‘사랑의 방법’을 따라(13장)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12절) 사용해야 합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비교하며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1____)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2___)하지 말라.”(39절) 초대교회 당시 방언의 은사가 호기심과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통역되지 않는 방언을 공적인 자리에서 말하는 것은 자기에게는 좋을지 모르지만, 교회의 덕을 세우거나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5-9, 17절). “방언을 말하는 자는 (3____)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4___)을 세우나니”(4절)

 

예언은 기본적으로 율법을 해석하거나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미래에 일어날 일을 말하는 것도 포함합니다. 초대교회에 미래를 알리는 의미의 예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행 11:28, 21:11; 27:23-26). 그러나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 교회가 세워지고 계시가 완성된 후에는 미래를 예언하는 은사는 사라집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형태의 예언은 목사의 설교 사역을 통해 지금도 계속됩니다. 종교 개혁가들은 목사를 ‘예언자’(prophet)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예언은 교회를 세우며(덕) 성도를 권면하며 안위케 합니다(3절).

 

22절은 난해합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앞에서는 방언이 신자 자신을 위한 것(4, 17절)이라고 했는데, 22절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고 합니다. 그에 비해 예언은 믿지 않는 자들이 듣고 이해할 수 있으니 불신자들을 위한 것인데 오히려 신자들을 위한다고 합니다. 22절은 무슨 말일까요? 22절은 21절에 인용된 이사야 28장 11-12절의 결론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5____)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21절) 아시리아 ‘방언’은 이스라엘 백성을 징계하는 하나님의 목소리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불신함으로 아시리아 방언을 말하는 자들의 공격을 받아 멸망한 것입니다. 이처럼 ‘방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 ‘징벌의 표’가 되는 셈입니다. 그에 반해 ‘예언’은 말씀을 듣기 원하는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된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33절의 말씀으로 은사적 섬김에서 오는 혼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6____)의 하나님이시니라.”(33절)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교회에서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7____) 있게”(40절) 해야 합니다.

 

생각하기  
방언과 예언의 유익을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해답  
답: 1. 예언, 2. 금, 3. 자기, 4. 덕, 5. 방언, 6. 화평, 7. 질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