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도의 교제’ 원리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나는)……성도의 교제(를)……(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성도의 교제’는 일차적으로 수직적 교제를 말합니다. 곧 성도가 하나님과 갖는 교제를 의미합니다. 옛 한글 사도신경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라고 번역함으로 성도 상호간의 수평적 교제만을 말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새 번역 사도신경은 “성도의 교제”(communio santorum)라고 원문 그대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성도의 교제’는 두 가지 차원이 있음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성도의 교제’는  ‘성도의 하나님과의 수직적 교제를 의미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져 하나님과 교제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성도는 예배하고, 성경 읽고, 기도를 지속합니다. 예배는 언약적 쌍방의 대화의 특징이 있습니다. 성경읽기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듣는 기회입니다. 기도(Oratio)도  본래 대화라는 뜻입니다. 성만찬도 바로 하나님과의 수직적 교제를 갖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성도의 수평적 교제’에 목숨을 겁니다. 그러다, 그것이 깨어지면, 상처 받고 교회를 떠납니다. 물론 교회에서 성도 상호간의 사귐은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수직적 교제보다 상호간의 수평적 교제만 찾고 즐기려 한다면 주객(主客)이 전도(傳導)된 것이죠. 성도의 수평적 교제를 극대화하면 사람이 좋아하겠지만, 하나님과의 본질적 교제가 약해질 우려도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수평적 교제’가 잘 되면, ‘수직적 교제’도 잘 되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일 뿐 참 교제가 아닙니다. ‘인간적 교제’가 ‘영적 교제’를 낳을 수는 없습니다. 수평적 교제가 주는 유익은 한계가 있고 일시적입니다. 참 기쁨과 복은 수직적 교제에서 옵니다. 우리는 위로부터 오는 기쁨을 찾고 맛보아야 합니다. ‘수직적 교제’에서 나오는 ‘수평적 교제’가 참 교제입니다.

교회의 성도는 한 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몸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몸이니 아무리 부인해도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몸의 지체인 성도는 서로를 향한 책임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하는 것은 반드시 있어야 하며 중요합니다. 이 교제는 강제가 아니며 기쁨이고 자원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 사랑’이 ‘사람 사랑’으로 연결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반대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사람 사랑’이 ‘하나님 사랑’으로 연결될 수는 없습니다.

다우리교회의 ‘성도의 교제’는 위의 원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식사 그룹이 함께 모이기도 하고 ,기타 나이와 관심이 비슷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교제합니다. 그러다보니, 성도의 교제가 적극적으로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같은 한 지역에 살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으니, 성도의 교제가 쉽지 않습니다. 서로 더 노력해야 합니다.

다우리교회는 설립초기부터 성만찬이 있는 주일에 함께 모여 성도의 교제를 나눕니다. 성만찬 예식에서 하나님과의 수직적 교제를 하고, 같은 주일 오후에 수평적 성도의 교제를 가집니다. 이 성도의 교제은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면서 겪는 만만치 않은 얘기들을 서로 나누며 함께 울고 웃으며 격려하고 기도하는 기회입니다. 차와 커피와 다과로 교제합니다. 맛난 음식을 먹는 기쁨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도가 서로 자신을 내어놓고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성도의 교제입니다.

아무리 좋은 원리와 제도가 있어도 문제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선한 목적과 방법이 있어도 현실은 만만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가 적다보니, 이웃을 향한 사랑과 감사도 줄어듭니다. 우리는 매일 매 시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멸망할 죄인인 우리를 위해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주셨음을 잊지 않고 그 사랑을 이웃에게 펼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의 교제는 그저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펼쳐 나누는 기회입니다.

2) 성도의 교제 방법

(1) 음료와 다과

맛난 음료와 음식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준비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 번 그런 일이 반복되면 주와 객이 전도되어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동안 다우리교회는 2달에 한 번 성찬을 하며 성도의 교제를 했었습니다. 그 때에는 오랜 만에 만나 어머니들의 수고로 만들어진 음식을 함께 먹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2018년부터는 1달에 한 번으로 성도의 교제 기회가 늘어났습니다 점심은 교회에서 비빔밥으로 비교적 간단하게 하고 가정으로 이동해 성도의 교제를 가집니다. 이 때 음식보다는 음료와 다과를 나눌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밥상별로 저녁 식사 시간에 모여 예전처럼 식사 교제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 가능성을 열어두더라도 기본은 차와 커피, 그리고 다과이면 좋겠습니다.

(2) 시간

시간은 교회에서 오전 예배를 마치고 비빔밥으로 함께 식사한 후 오후 1시 20분 정도에 성도의 교제로 모이는 가정으로 출발합니다. 가벼운 대화로 모임을 시작하다가 설교 나눔의 시간을 갖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정별로 기도제목을 나누고 함께 기도함으로 폐합니다. 이 모든 진행은 호스트가 기획하고 진행합니다.

(3) 설교 나눔

성도의 교제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 특히 설교에서 무엇을 배웠고 깨달았으며, 또 어떻게 자신의 삶에 적용하려고 애쓰고 있고,  또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를 나눕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듣고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우리의 죄성과 사탄의 공격이 거세기 때문입니다. 믿는 성도가 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서로 이해하고 격려하고 공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가르침을 통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과 또 그런 노력을 서로 나누고 격려하며 기도한다면 좋은 성도의 교제가 될 것입니다.

(4) 삶 나눔

서로 오랜 만에 만났으니, 각 가정의 기쁜 일과 힘든 일을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기억해야 할 것은 ‘겸손한 마음’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은 자랑이 되기 쉽고, ‘힘든 일’은 수치심을 느끼기 쉽습니다. 은혜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서로 죄를 고백하며 기쁨과 슬픔을 나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엡 4:15).

(5) 공평과 질서

얘기를 하다보면, 여자는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분리되기 쉽습니다. 아마 관심의 분야가 비슷한 쪽으로 모이다보니,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시간도 필요하겠지만, 가능한 전체(남녀)가 둘러 앉아 인도자(호스트, Host)의 안내로 규모 있게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6) 조심(1)

대화를 하다보면 어떤 한 사람에게 얘기가 집중되기도 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만한 나눔을 위해 인도자가 개입할 수 있습니다. 인도자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얘기가 너무 길어지거나 주제에서 벗어날 경우 정중하게 중지시킬 수 있습니다. 인도자는 방향을 잡아 주는 역할을 해 줍니다.

(7) 조심(2)

정치적 주제는 쉽게 ‘야당’과 ‘여당’으로 편 가르기가 되기 일쑤이고 끝없는 논쟁으로 발전해 악한 감정의 벽에 이르기 쉽습니다. 성도는 ‘예수당’(?)의 입장에서 균형 있게 현실적 이슈를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상대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들어주는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8) 중고등부와 청년

중고등부나 청년부 나이도 어른들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또래와 모이는 것이 재미있고 흥미가 있겠지만, 어른들과 같이 있으며 배우는 것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의치 않을 경우 다른 공간에서 위와 같은 주제로 얘기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9) 유치와 초등학생

초등학생들은 위험하지 않게 다른 방에서 보드게임이나 장난감으로 놀이를 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아이가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을 미리 준비해 오면 어려움을 좀 더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